week 35. 작가의 발견

금주에 출간된 소설의 목록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였다. 2015년 1월 이 작가를 알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정전의 목록에서도 볼 수 없었고, 신뢰하는 작가의 추천을 받은 이름도 아니었다. 소멸하는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표지가 특별하지도 않았고,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책의 제목도 상투적이었다. [금요일의 리스트]에 소개할 책을 고르는 과정에서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50년 만에 부활한 베스트셀러라는 사연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띠지에는 이언 매큐언의 찬사가 적혀있었다. 그의 추천이라면 믿고 보는 수밖에. 그렇게 이 놀라운 작가를 만났다. <스토너>를 읽는 읽는 경험은 특별했다. 책에 관한 어떤 사전지식 없이, 온전히 소설 속 인물에 빠져들었다. 자발적인 전도사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난해 가장 자신만만하게 많은 이들에게 추천한 소설이기도 했다. 새로운 작가의 발견은 그만큼 기쁜일이었다.

나는 전작주의자다. 한 작가에게 매혹되면, 그의 전작을 차례로 읽어나간다. 신작부터 거꾸로 읽어가기도 하고, 데뷔작부터 차례로 따라가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작품들의 우열을 가려보기도 한다. 좋으면 좋은 데로, 실망스러우면 실망스러운 데로, 모든 만남이 즐겁다. 작가를 좋아하게 된 그 순간 이후 모든 만남은 연애를 하는 것 만큼이나, 둘 사이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다시 만난 존 윌리엄스라는 이름은 반가웠다. 평생 4권의 소설밖에 남기지 않았고, <스토너>를 제외한 어떤 책도 찾을 수 없는 작가였기에.

존 윌리엄스가 1965년 <스토너>를 발표한지 7년뒤인 1972년에 나온 소설이 <아우구스투스>다. 21세기에 철저한 무명이던 그의 이름을 알린건 <스토너>였지만, 정작 생전의 그의 대표작은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에게 명예로운 전미도서상을 안긴 작품이었다. 존 윌리엄스는 1985년 덴버대의 문학교수직을 은퇴했고, 미완성 소설만 남긴 뒤 세상을 떠났으니 이 소설은 마지막 작품이 됐다. <스토너>, <도살자의 건널목> 등의 실패와 달리 이 소설은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스토너라는 인물의 보잘 것 없고 실패한 삶을 다룬 뒤, 로마제국의 위대한 첫 번째 황제를 다룬 소설로 성공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로마의 이야기다.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한 곳. 가치보다 특권을 존중하고 원칙이 이기심에 굴복하는 곳. 편지와 일기, 회고록 등의 형식을 통해 주변인물의 목소리가 다성화음처럼 모여 아우구스투스라는 인물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마지막에야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역사 속 영웅이 얼마나 평범한 인간이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분투했는지 묘사한다. 작가에게 있어 보잘 것 없는 스토너와 로마의 영웅은 본질적으로 다를게 없는 인간이었다. 카이사르마저도 이렇게 외친다. “세상을 정복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구나.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여주면 마치 질병이라도 만난 듯 달아나버린다. 믿을 만한 자들을 외면하고 언제든 배신할 인간들을 사랑하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채 이렇게 국가를 이끌고 있구나.”

서문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작가의 일러두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에 진실이 있다면, 역사보다는 픽션의 진실이다. 독자들이 그 의도, 즉 상상력의 결과로 받아들인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픽션의 진실을 말하는 작가에게서 자신의 소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수십 년에 걸쳐 세 권의 소설만을 발표했지만, 다시 한 번 실패할지도 모르는 독자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그는 자신의 소설이 언젠가는 발견되길 염원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금주에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소설이었다. 이어서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선택받았다. 결혼한 한 커플의 삶을 통해 일상의 범주에 들어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던 연인도 어느 순간 낭만적인 사랑의 주술에서 풀려나게 마련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사랑의 속성이 어떻게 지속가능할 것인지 현실적인 논의를 펼친다고 한다.

[소설리스트 | 김슬기]

week 34. 듣고 읽으며 견디는 여름

노래에 관한 짧은 글을 번역하고 있다. 노래를 들으며 하고 있다. ‘노동요’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아티스트 다프트펑크의 음악. 매번 <Random Access Memory>나 <Human After All>에 있는 노래들만 듣다가, 다른 앨범들도 찾아 들어보기로 하고 발견한 앨범은 영화 <Tron>의 사운드트랙이다. 무더위와, 출국 전날 촬영을 못하겠다고 통보해온 해외의 촬영지 때문에 넋을 놓고 지냈던 일주일 동안 그 앨범만 듣고 있다.

번역 중인 존 버거의 <Some Notes on Songs>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노래를 듣는 것은 그 안에 담기기 위해서다.’

‘그 안에 담기다’로 번역한 단어는 ‘enclosed’다. ‘감싸다’로 자주 번역되는 ‘enclose’는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둘러싸는 것을 뜻하고, 그때 감싸는 무언가는 그것이 감싸는 대상과 그 대상을 둘러싼 것들 사이의 막으로 작용한다. 감싸는 무언가는 담이나 방(의 벽)처럼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둠이나 슬픔처럼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존 버거는 노래가 노래를 듣는 이를 감싸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우리를 감싼 노래의 막이 잠시, 그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를 외부로부터 지켜준다. 노래를 듣는 이는 그 시간만큼은 노래에 ‘담긴’ 채 안전하다. 어떤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바깥세상을 잠시 잊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무더위나 외국에 있는 유적지 관리담당자의 사정 같은 것들… 무더위가 지나가고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 담당자의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일 때, 다치지 않고 그 기다림의 시기를 지나는 것도 능력이다. 상황만큼이나 그 상황에 맞서는 우리의 컨디션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외부의 상황이 당분간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때를 대비해 나의 상태를 만들어놓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걸 ‘준비’라고 한다. 노래가 도움이 된다. 노래 한 곡을 듣는 만큼의 시간, 그 시간만큼의 황홀함을 무시하지 말기를… 한 곡을 듣고 돌아와도 여전히 암울하다면, 같은 곡을 한 번 더 듣자.

그 사이 무더운 여름은 지나갈 테니까. 무더위가 지나갈 거라는 사실만큼 분명한 건 없으니까. 그리고, 아직 내가 듣지 못한 좋은 노래와 읽지 못한 좋은 소설은 계속 나타날 테니까. 그것도 무더위가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말만큼 확실하니까.

이번 주 소설리스트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작품은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이다. 제목이 이 지경인데도 이렇듯 지지를 받은 것을 보면 소설가의 저주 따위는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못 된다는 뜻일까? 아무튼 작품은 뉴욕을 배경으로 아르헨티가 출신의 망명자와 그를 돌보는 미국인 요양사 사이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물리적으로 먼 나라의 이야기는 종종 그 거리만으로 매력적이다. ‘대화체’로만 되어 있다는 형식상의 신선함이 그러한 매력에 더해져서, 많은 기대를 낳았다.
두 번째로 많이 선택받은 작품은 일본의 신인작가 이마무라 나쓰코의 <여기는 아미코>다. 소녀 아미코의 시선에 비친 오해와 어긋남, 그로 인한 상처들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고 한다. 데뷔작으로 다자이 오사무 상과 미시마 유키오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는 화려한 수상 실적도 작품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작품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다. ‘화산 자락에서’ 라는 일본어 원제는 지나치게 중립적이었을까, 한국어 제목은 뭔가 더 애틋하다. 신인 건축가가 존경하는 노건축가와 함께 지냈던 일 년 여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건축과 삶에 대해 고찰하는 작품으로,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이다.

[소설리스트 l 김현우]

week.33 문학 이전의 언어

“다시 만나면 적어도 30년은 행복할 거야.
돌아가면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게.

담배 십만 개비도 사 주고 싶고, 예쁜 드레스 여러 벌과 자동차도,
늘 꿈꾸던 화산암으로 지은 집과 작은 꽃다발도 주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좋은 포도주 한 잔 하며 날 생각해줘.

여기는 일이 산더미야. 일꾼은 100명이 넘어.
이틀 전 내 생일날 당신 생각을 오래 했어.

내 편지는 잘 도착했어?
당신은 여전히 소식이 없네. 언젠간 오겠지.
매일 매순간 당신과 나만을 위한 아름다운 말을 외워.
우아한 비단 잠옷처럼 우리에게 꼭 어울리는 말을.

한 달에 편지 한 통 밖에 못 보내.
당신은 여전히 소식이 없네.

벽을 쌓다 보면 무서워져.
내겐 시멘트와 곡괭이 당신에겐 침묵. 날 삼켜버릴 듯한 웅덩이.
이 끔찍한 공포를 견디기가 힘들어.
당신 머리칼은 마른 풀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당신을 잊어버릴 것 같기도 해.”

– 페드로 코스타, 영화 <행진하는 청춘> 중
남자의 이름은 벤투라. 그는 흑인이었고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아내와 집을 잃은 뒤,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며 만난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계속 알 수 없는 편지글을 중얼거렸다. 그가 (문자를) 읽을 수 없다는 걸,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종이가 없었고, 외우고 또 외워서 얻게 된 이 말들 만이, 화면 밖을 떠도는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영화는 지루할 만큼 길었고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꼭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극장 밖을 나온 뒤에도 그 느낌은 계속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인 카네이션 혁명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다. 그것은 리스본의 봄이라고도 불렸다. 혹은 1974년 4월 25일 혁명. 포르투갈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40년 넘게 이어진 독재정권의 식민지 전쟁에 반발해 발생한 무혈 쿠데타라고 되어 있었다. 당시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들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하여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다른 일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독립을 허용하면서, 당시 포르투갈에 체류하고 있던 5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부로부터의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숨쉬고 걸어다니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벤투라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그를 떠나갔고, 친한 친구도 죽었다. 그가 읊었던 아름다운 연애 편지는 친구를 위해 대신 쓴 편지였다. 청한 사람도, 쓰는 사람도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기에 오직 소리로만 가능한 편지. 분명 거기 있지만, 사라진다 해도 누구도 알지 못할 편지.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의 삶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존재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자리에도 소리는 남는다. 생각, 정신, 마음, 권력에 의해 결코 탈취될 수 없는 혼 같은 것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날 나는 ‘문학 이전의 언어’를 본 것 같았다.

현대 소설의 탄생이 내셔널리즘, 국민 국가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오카 마리). 유럽에서의 소설은 신의 시선에서 보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지배적 열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슬람을 비롯한 어떤 문명에서는 본질적으로 현대 소설이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천일야화>의 나라에서 문학은 구전이며, 이야기하는 행위로서 존재하는 종결 없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현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내가 한 언어를 읽고 쓸 줄 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현대 소설의 기원과 정체성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셈이다. 그 틀에 담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 못한다. 나는 한동안 어디에도 담길 수 없는 목소리를 생각해보았다.

*

이번 주에는 지난 주와 달리, 비교적 적은 수의 소설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소설리스트가 가장 주목한 책은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이다. (이 책은 이미 출간된 바 있지만, 이번에 다시 간행되었다.) 지구 종말과 인류 종말이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미국에서는 1976년에 나왔다. 그러나 무려 40년이 지난 현재에 다시 두고 읽어볼 만한 시사점을 지닌 듯하다. “세상은 지옥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인류를 지켜주던 둥지는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다. (…) 새로운 질병이 세상을 뒤덮고 있으며, 전 인구로 퍼져나가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러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더러운 물을 대신할 것도 없다”는 줄거리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다음으로 주목한 책은 국내에 많은 작품이 소개된 요 네스뵈의 <바퀴벌레>이다. 작가 본인이 ‘나를 작가로 만든 소설’로 명명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오슬로로 돌아온 형사 해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실의 무게에 짓눌린 해리는 어느 날, 경찰에 다시 호출되어 태국으로 파견되고 ‘바퀴벌레’ 같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외로, 최수철의 <포로들의 춤>이 선택을 받았다. 최수철의 여섯번째 소설집으로, 한국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위스의 사진작가 베르너 비숍이 남긴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이 연작 소설들은, 50년대의 포로수용소 광장에서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시청 앞 광장까지 길고 먼 시간을 거슬러 한국의 역사에 관해 말한다. ‘사진에 봉인된 과거의 역사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현재의 역사로 이어질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역사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가.’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소설리스트 | 준]

week 32. 마음이 이끄는 대로

요 며칠 뜨거운 날씨가 이어진다. 햇살 하나하나가 밖에서 걸어 다니는 일상적인 활동조차도 무리입니다! 라고 경고장을 날리는 듯하다. <메트로폴리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비롯하여, 모든 근미래 SF는 기계 지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다뤘지만, 지금이라면 에어컨의 신 하나만으로도 한국인 정도는 쉽게 지배할 것만 같다. 아니, 우리가 스스로 그 신을 모시고 싶을 것이다. 머리가 뜨거워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뜨거운 머리는 역시 어감이 좋지 않다. 인류는 역사상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의 은유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나는 실은 영혼의 집으로서의 심장을 다룬 애틀랜틱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두뇌의 시대에도 심장은 여전히 상징적 힘으로 남아 있다.”http://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6/08/the-enduring-metaphors-of-the-heart-this-mortal-coil-fay-bound-alberti/494375/) 그리스 시대부터 영혼이 심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체액이 우리의 기질을 결정하고, 피가 우리의 삶을 만든다. 카툴루스는 그의 시 76번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quae mihi surrepens imos ut torpor in artus expulit ex omni pectore laetitias (나의 깊은 내면으로 마비처럼 기어들어 기쁨을 몰아내는 [폐허].)” 그러니 이미 로마 시대에도 사람들은 가슴, 심장 (pectus)이 기쁨을 담는 곳이라고 믿었다.

근대 이후 의학의 발달로 우리의 감정은 두뇌가 조절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정신은 머리에, 마음이 가슴(심장)에는 있다는 은유를 강하게 유지한다. 기사에 언급된 역사가 바운드 알버티에 따르면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가슴을 가리킨다고 한다.”  우는 하트, 웃는 하트 그림처럼 우리는 여전히 영혼과 감정은 심장에 있다고 쉽사리 생각한다. 우리의 감성을 결정하는 것이 호르몬, 시냅스의 전기 신호임을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여전히 냉혹한 사람을 심장이 차갑다는 말로, 열정적인 사람을 심장이 뜨겁다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의 성질이 어떠하든 심장의 온도는 대체로 비슷할 텐데도. 또한 심장 이식을 한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서사 또한 여전히 흔하다.

심장의 은유가 유효한 것은 어쩌면 인간은 여전히 우리의 감정이 이성이 지시하는 것과 반대로 움직이거나 감시를 피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의학은 심장은 사실 감정이 시작하는 출발지점이 아니라 다다르는 목적지에 가깝다는 걸 알려주었다. 설렐 때 가슴이 뛰는 것은 감정이 그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일어난 감정이 두뇌에 신호를 주어 심장을 빠르게 움직이게 한 결과이다. 그 사실을 알아도, 우리의 가장 정확한 판단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가지 않는 마음을 달리 설명하고 싶은 바람이 우리에게 심장을 하나의 그릇, 장소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기는 정말 영혼이 가슴에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감정이 그에 깃들어 있지 않다면, 하늘에 떠오른 아름다운 빛을 보았을 때 심장이 뛰었던 것, 사랑스러운 사람의 웃음에 심장이 죄었던 것, 내일 떠나야 하는 여행을 두고 밤에 눈을 감았을 때 가슴이 벅찼던 것,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떠난 감정이 심장에 담겨 있지 않다고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읽었던 어떤 이야기에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도.

이 더위에 우리의 가슴을 더 뜨겁게 할까 기대되는 신간들이 이번 주에도 있다. 제시 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비채) 2014년 영국내셔널북어워드 수상작으로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미스터리이다. 새로운 삶을 기대했던 넬라를 맞은 것은 “숨어서 키득거리는 것 외에 웃을 일이 없는” 듯한 사람들이다. 차가운 저택에서 그녀의 위로가 되는 건 아홉 칸짜리 미니어처 하우스뿐.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설명을 단 미니어처리스트의 광고를 발견하고 그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넬라의 주문에 미니어처리스트는 물품을 보내오며,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라는 글귀를 함께 적었다. 차갑고 기만적인 결혼에 빠진 여성이 어떻게 자기 운명을 설계하는지 소설은 그 건축을 따라갈 것이다.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탄 문호들이 쓴 미스터리를 엮은 <헤밍웨이 죽이기> (책읽는섬)도 출간되었다. 수록작가로는 루드야드 키플링, 아서 밀러, 윌리엄 포크너, 버트런드 러셀, 에드나 빈센트 밀레이 등등이며 엮은 이는 추리 작가 엘러리 퀸이다. 이 모든 작품이 엄밀한 의미의 미스터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단편이 주는 서스펜스와 신비로운 분위기는 여름을 넘기기에는 충분할 듯싶다.

이번 주는 리우 올림픽의 기간이기도 하다. 남반구의 올림픽이라서 다행이다. 어차피 잠 못 드는 열대야라면 심장을 뛰게 하는 스포츠 경기라도 보는 편이 좋다. 그러나 올림픽이든 아니든 언제나 소설은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아주기를 뜨거운 마음으로 바란다.

[소설리스트|박현주]

[소설 속의 음악]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그래서 필용은 종로로 나갔다. 종로에 나가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 걷다보니 종로까지 간 것이었다. 필용은 걸으며 울었다. 퀸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내 평생의 사랑]을 들으며 울었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며 울었고 [구해줘]를 들으면서는 따라 부르다 사레가 들려 크허헉거릴 정도로 울었다. 세이브, 세이브, 세이브 미, 구해줘, 구해줘, 필용은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들며 하소연하고 싶을 만큼 간절해졌다.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week 31.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면 아연실색하고 말 그런 가정들, 그런 삶들이 있다. 기껏해야 2주일을 넘길 수 없을 것 같은 무질서가 여러해 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그런 문제적인 가정들, 문제적인 삶들도 온전하게, 빈번하게, 비상식적으로 지속된다. 그럼에도 이성이 틀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의 힘이, 그것도 힘이라면, 서둘러 그런 삶들을 전락을 향해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별난 사람들과 그들의 반사회적인 행동은 그들을 파문하는 다원적인 세계의 매력이다. 사람들은 그 가볍고 비극적인 영혼들이 호흡하는 태풍의 불어나는 가속도 때문에 불안해한다. 그 시작은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짓거리이고, 처음에는 그저 놀이로만 보인다.”

-<앙팡 떼리블> 79~80쪽, 장 꼭또 지음, 심재중 옮김

7월의 마지막 주, 소설리스트 멤버들이 가장 주목한 소설은 장 꼭또의 <앙팡 떼리블>이다. 압도적이라기보다는 근소한 표차로 이주의 첫번째 언급이 된 <앙팡 떼리블>의 뒤를 이어, 구사카베 요의 의학 미스터리 <무통>, 제임스 P. 호건의 SF <별의 계승자>,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언급되었다. 장정이 근사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사뮈엘 베케트 선집’의 첫 간행물로 <죽은-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가 함께 출간되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누군가의 취향을 직격하리라, ‘맞지 않는다면’ 아마도 열대야의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할지도.

“남아도는 불필요한 존재, 한결같이 저속한 영혼의 소유자, 사랑을 내가 그 사랑을 거짓으로 꾸며댔어, 그런 나를 피하려고, 음악도, 야생 까치밥나무의 향기도. 기관들, 외부, 이런 것들이야 쉽게 하는 상상들이지, 다른 상상들은, 신(神), 이건 당연한 거고, 여하간 이러한 상상들을 사람들이 하고는 해. 쉬운 일이니까, 그렇게 해야지 가장 중요한 문제로부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깐이라도, 잠들 수 있으려면. 맞다, 신, 나는 신을 믿지 않았어, 평화의 비호자라는 신을, 단 한순간도. 나는 또 휴식들마저도 더 이상 갖지 않을 거야. 아니 그래서 내가 나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 내 한심한 생각들을 야기했고, 내 진술들대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거야?”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30쪽, 사뮈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기동전사 Z건담>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같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오마주했다는 <별의 계승자>는 2009년 한국에서 첫 출간되었고,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되었다. <무통>은 두 천재 의사가 주인공인 의학 미스터리인데,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중국에서는 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세대를 ‘빠링허우’라고 부른다고 한다. 빠링허우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신이우의 <약속의 날>, 그리고 <내가 잠들기 전에>를 쓴 S.J. 왓슨의 2015년작 <세컨드 라이프>도 함께 언급되었다.

<앙팡 떼리블>은 ‘무서운 신예’라는 뜻으로 일반명사처럼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그런 관용구가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제는 낡아서 더이상 쓰지 않는 말이 된 것 같지만, 80년대에는 꽤 빈번하게 일간지 지면에서 볼 수 있었다(그것도 제목으로!). 제목이 워낙 귀에 닳아서일까,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독서가 손에서 놓기 어려운 흥미진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읽기 전까지는 소설을 알 수 없다. 모든 문자들을 그 자리에 놓기 위해서, 그 모든 단어들을 통해야만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을 위해서, 문학이 존재한다. 기분좋은 발견의 시간이, 당신의 여름과 함께 하길.

[소설리스트|이다혜]

week 30. 그게 그거가 아니라서, 디어 미스터 쿡!

애플컴퓨터사의 대표인 팀 쿡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두 번 있었다.
첫번째 편지의 사연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
디어 미스터 쿡.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의 소설가 김아무개라고 합니다. 2015년 가을, 저는 장편소설의 배경지를 취재하기 위해 일본에 장기체류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 기회를 틈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심정으로 그간 사용한 맥북에어를 은퇴시키고, 그 해 여름에 새로 나온 맥북을 샀습니다. 새 맥북의 베일 듯한 두께를 보니, 제 아무리 작가의 블록이 있다손치더라도 얇게 도려낼 것 같더군요. 그런데 미스터 쿡! 이게 웬일입니까? 두 달 만에 왼쪽 시프트키가 안 먹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왼쪽 시프트키가 안 먹히면 오른쪽 시프트키를 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지난 20년 간 왼쪽 시프트키로 쌍모음과 겹따옴표와 물음표를 입력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도무지 글을 쓸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한 줄도 못 쓰고 빈털털이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슬픈 사연을 접한 김중혁과 금정연은 이구동성으로 ‘이것은 좋은 기회다. 이번 기회에 울리포를 능가할 수 있다. 시프트키를 전혀 쓰지 않고 장편소설을 하나 쓰는 게 어떠냐?’고 말하더이다.(그렇다면 그 소설엔 일단 대화가 없어지겠지. 질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글을 적어보니 ‘이런 식으로 시프트키를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글을 작성하기가 가능하기는 합니다만, 왜 이 아름다운 맥북을 사놓고서 제가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여기까지는 시프트키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AS센터에 갔더니 사과 마크가 아름답게 새겨진 그곳에서는 왼쪽 시프트키에 비정상적인 힘을 가한 것으로 보이니 전적으로 제 과실이라며 키보드 전체를 갈아야만 하며, 수리비는 아마도 40만 원 이상이라고 말하더이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얼마라구요? 미스터 쿡, 쿡은 정말 제가 한국의 조르주 페렉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인가요?……운운.
하지만 이 편지를 쓰기 직전, 한국 본사의 전문가와 한 시간이 넘게 전화로 ‘상담(사투?)을 벌인’ 끝에 이 문제는 잘 해결됐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미묘한 상황의 영향을 받는지 여러분들은 아시는가? 왼쪽 시프트키가 고장나면, 그 순간부터 글쓰기는 중단된다. 당신들은 엔지니어들이니까 오른쪽 시프트키로 대체하면 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왼쪽 시프트키로 입력할 수 있는 글자는 왼쪽 새키손가락만이 입력할 수 있다. 예컨대 “얘?”라는 글자는 왼쪽 새끼손가락이 없다면 쓸 수 없다. 그리고 “얘?”라는 글자를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글자도 나는 쓸 수 없다. 왜 그런지는, 아마도 또 다른 사연까지 들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사연은 실제로 발송했다. 물론 팀 쿡의 메일 주소를 몰라 애플로 보내긴 했지만. 그건 아이패드의 폰트 문제다. 애플은 아이패드가 꽤 유용한 생산성 도구이니 전세계의 소설가들이 이제는 휴가지의 선탠 베드에서도 단편소설 정도는 아이패드로 뚝딱 마감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다른 나라의 소설가들은 모르겠지만, 나한테만은 절대 안 된다. 왜냐? 아이패드에서는 중명조체를 쓸 수가 없으니까. 나는 중명조체가 있어야만 한다. 중명조체가 아니라면 메일이나 문자를 보낼 수는 있어도 좋은 소설을 쓰기는 어렵다. 아이패드로 끄적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소설은 집에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쓸 수밖에 없다.
나 말고도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 많았는지 언제부터인가 애플의 글쓰기 앱인 페이지스에서는 나눔명조와 나눔고딕을 사용할 수 있게 됐지만, 말했다시피 내가 원하는 건 중명조였다. 폰트를 설치할 수 있는 한컴의 앱도 사용해봤지만, 그건 어절 사이의 간격이 문제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컴의 앱은 피씨처럼 글자의 반 자 간격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한 자 간격으로 벌어졌다. 뭐가 그렇게 까다롭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쓴다는 게 원래 그렇게 까다로운 거 아니냐고 나는 되묻고 싶다. 어절 사이의 간격이, 서체가, 장평과 자간이 주제나 소재나 캐릭터나 플롯만큼이나 중요하다. 제발 그게 그거라고 말하지 말라. (계속 읽으면 알겠지만) 고통스러우니까.
내가 애용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은 Literature and Latte(회사 이름부터가 아름답다!)에서 만든 Scrivener다. 처음 아이맥을 구입한 이유가 바로 이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이들이 만든 프로그램 매뉴얼은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가장 문학적이다. 들여다보노라면, 이 정도로 작가의 일을 잘 이해한다면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몇 년 전부터 이들이 iOS용 앱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에 나는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지난주 7월 20일 마침내 앱스토어에 앱이 등록된다는 공고가 홈페이지에 떴다. 영국 시간으로 앱이 등록된다기에 하루 종일 기다린 끝에 아이패드용 앱을 구입했다. 그리고 곧장 찾아보니 아이패드의 폰트 문제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았다.
One simple solution is to use only fonts that you know are available on all platforms. This can be a pain if you have a preferred font for writing in, though. (보입니까, 미스터 쿡!)
역시 그들은 소설가가 늘 쓰던 폰트가 아닌 다른 폰트로 글을 쓸 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아이패드에서 중명조로 아름답게 쓰고 있다. 서체가 아름다우니 내용이야 어떻든 글은 아름다워 보인다. (자세한 안내는 https://scrivener.tenderapp.com/help/kb/ios/using-fonts-across-platforms 링크를 따라가면 알 수 있다시피 다른 글쓰기 앱에서 원하는 폰트를 사용하는 방법도 나와 있다.) 까다롭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없다. ‘그게 그거야!’라고 말할 때 제일 먼저 망가지는 게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고통이다. 진짜다.
이번주에는 소설리스트의 관심이 세 권의 소설에 집중됐다. 이 세 소설의 공통점은 여성이다.
제일 먼저 에리크 악슬 순드의 <크로우 걸>. 스티크 라르손, 요 네스뵈 등 북유럽 스릴러에 관심이 많다면 눈여겨 볼 작가다. 2010년부터 3년간 <크로우 걸>, <헝거 파이어>, <피티아의 가르침> 등으로 이뤄진 ‘빅토리아 베리만 3부작 시리즈’를 출간해 스웨덴에서만 15만 부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엄마이자 아내인 형사반장 예아네테와 어릴 적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을 상담하는 정신분석가 소피아 세텔룬드가 등장한다.
두번째는 안느 브레스트의 <완벽한 여자를 찾아서>. 2010년 공쿠르상 신인상을 수상한 작가의 세번째 소설로 각 장마다 각각 10여 명의 여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각 장의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종결되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 십대부터 오십대 여성까지, 스포츠 스타를 꿈꾸는 소녀부터 주부, 회사원, 약제사, 의사, 상담사, 예술가, 심지어 한때 매춘의 이력이 있는 여성까지 연령과 직업 면에서도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
마지막은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육식 이야기> 등으로 주목을 받은 벨기에의 젊은 작가 베르나르 키리니의 <목마른 여자들>이다. 기왕에도 기발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1970년 페미니즘 혁명으로 탄생한,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여성 제국으로 수십 년 만에 발을 들이게 된 프랑스 지식인들의 여행담이다.
[소설리스트|김연수]

week 29. 우리가 주고받은 아름다움

친구들 셋과 책키라웃이란 이름의 소규모 독서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책 한 권을 정해 각자 읽고 소회를 나누는 기본적인 형태의 독서모임. 취향도 관심사도 조금씩 다른 넷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역시 책을 혼자 읽고 덮었을 때와는 또다른 매력이 보이고, 그것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된다. 얼마 전엔 특정한 책을 정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책을 들고 만나기로 했다.나는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을 지참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이미지에 이끌려 그것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과정이 주는 아찔함.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장르의 경계에 서서 내가 생각하는 장르란 무엇인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하는 신선함. 내 손에 쥔 아름다움을 말하는 동안 내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졌다

친구들도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꺼내놓았다. 한 친구는 파스칼 메르시에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내밀었다. 현실이 지독히도 힘들다고 느꼈을 때 마음으로라도 도망칠 곳을 마련해준 책이었다며. 또 한 친구는 김지은 아나운서의 미술 에세이 <서늘한 미인>을 꼽으며 불온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단 생각을 강하게 심어준 책이며 이 책을 읽고 회사를 그만둘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가 <정글북>을 모티프로 한 에코백에서 꺼낸 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일단 이 책이 다루는 우주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우며, 자기가 머리에 이고 살았던 천체가 이렇게나 아름답다는 걸 미처 몰랐으며, 읽고 나니 일상이 한층 아름다워졌다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경청하고 매혹되었다. 개중 자신이 읽은 책이 있으면 예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여러 감탄사와 감정적인 형용사들이 잔뜩 쏟아지던 그 시간은 묘하게 에로틱한 여름밤으로 우리에게 남으리라. 아름다움과 뜨거움과 여름밤은 각각 거리가 가까워 이 셋이 함께일 때 묘하게 조화로웠다. 한 권의 책에 고여 있던 모종의 에너지가 그 책을 읽은 사람에 의해 깨어나 은밀한 기운으로 발산된다. 우리가 주고받은 아름다움은 또 어디로 어떻게 퍼져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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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생경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소설이 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첫 두 문장이다. 서둘러 세 번째, 네 번째 문장을 더듬게 만드는 이 작품은 밀란 쿤데라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체코 최고의 작가라고 칭송한 보후밀 흐라발의 장편소설이다. ‘프라하의 봄이후 1989년까지 정부의 검열과 감시로 많은 작품이 이십여 년간 출판 금지되었음에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해외 언론과 작가들로부터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린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작가가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라고 말한, 작가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자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품이다.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 자신을 은폐한 채 천장 뚜껑문으로 쏟아져들어오는 폐지를 처리하는 독거노인 한탸를 통해 작가는 책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다. 나아가 생산성, 효율성 일변도의 세상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며 쓸쓸하게 추방당하는 어떤 유의 존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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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한 번 출간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만약 책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다면 저자가 독자를 찾아나서겠지만, 남아 있지 않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1992년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베일에 싸인 작가 엘레나 페란테(이 이름 역시 필명이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나의 눈부신 친구>도 여러모로 매혹적인 작품이다. 나폴리 여성 레누릴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을 그린 나폴리 4부작중 제1권인 작품으로, 두 주인공의 유년기부터 사춘기까지의 삶을 담고 있다. 서로가 라이벌이자 뮤즈인 두 여성의 굴곡 많은 삶과 제2차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으로 궁핍한 시기를 보내던 이탈리아의 사회적 배경, 나폴리를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마피아란 존재 등 입체감이 돋보이는 작품에 흠뻑 빠져 더위를 잊어도 좋겠다.

[소설리스트|강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