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태업

책과 관련된 일을 할 때의 좋은 점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의 나쁜 점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아침에 로버트 고틀립의 회고록 “ 열렬한 독자 (Avid Reader)”를 소개하는 NYT 기사를 읽었다.  사이먼 & 슈스터와 알프레드 A. 크노프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그는 평생 쉼 없이 책을 읽었다. 아내의 분만실에 들어가서도 신시아 오직의 원고를 검토했다고 농담으로 말할 만큼 그의 인생은 독서로 점철되어 있었다. 조셉 헬러, 토니 모리슨,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의 원고가 그의 연필 밑을 스쳐 지나갔다. 기사에는 책의 한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처음부터 글은 현실보다도 내게 더 현실적이었고, 확실히 더 흥미로웠다.”
굳이 편집자, 작가, 번역가가 아니더라도 열렬한 독자로 자기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현실보다 소설 속의 세계가 더 생생하고 재미있다. 그는 당연하기도,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세계는 너무도 좁고, 나열된 사건들은 재조합하지 않는 한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소설들은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있는 이들이 써낸 글을 라이언 고틀립 같은 열렬하고 능숙한 독자가 매만져서 재조립한 세계이다. 이 세계는 밀도가 높고, 확장 가능하며, 무엇보다도 허무가 적은 세계이다.
하지만 모든 다른 일들처럼 독서가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온다. 이 책이 건설한 세계에서 저 책이 건설한 세계로 넘어가면서 그사이의 현실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드라마 <W>의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현실과 허구가 하나로 합쳐진다. 지나치게 세련된 독자의 가장 큰 문제는 언어화되지 않은 사건을 접할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아닐지. 언젠가 나는 한 열렬한 독자인 젊은이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전 세상에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까, 언어는 위대하지만 기억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는 음악의 선율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넓은 황야 위에 섰을 때 코끝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던 바람의 향을 재생할 수 있을까. 거대한 힘 앞에서 무너지고 잃어버린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언어로는 이들을 소환할 수 있지만, 언제나 한 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있다. 책이 우리에게 중요한 건 책이 지어낸 각각의 세계와 세계 사이에 언어가 만들어낸 거리, 바로 현실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독서의 연쇄에서 어느덧 피곤을 느낀다면 바로 이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 지난주의 맑았던 어느 날 나는 공원의 야외 평상에 널브러져서 나뭇잎에 둘러싸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 한 권을 막 읽고 밖으로 걸어 나온 참이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땅에 어떤 종류의 책이든 읽지 않고도 가시가 돋지 않는 사람들은 4천5백2십만 명 정도 있을 것이고, 매일 뭔가 읽지 않으면 생계에 지장이 생기는 나도 한참을 읽지 않아도 멀쩡하다. 아마 읽지 않아야 더 멀쩡할지도 모른다. 즉, 책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세상보다는 하루 정도는 (아니 일주일 정도는) 책을 읽지 않아도 가시가 돋지는 않는 세상이 더 긍정적일지 모르겠다.
지난 한 주에는 출간된 소설이 적었다. 추석 연휴의 여파인 것으로 짐작한다. 단순히 적다는 이유뿐만은 아니지만, 소설리스트는 이번 주에는 독서 태업을 추천한다. 추천하는 신간 소설이 없다는 뜻이다. 책과 책 사이의 휴가가 되기를, 다행히 그에 어울리게 가을 하늘이 높고 바람이 선선하다.
[소설리스트 | 박현주]

week 38. 읽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소도시의 도서관에 갈 일이 있었다. 더위가 막 한풀 꺾이려던 참이어서 벼는 아직 잎사귀와 같은 색이었고, 냉장고에서 뭘 꺼내도 금방 미지근해졌다. 기차역으로부터도 시외버스터미널로부터도 차를 타고 최소한 30분은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사서 님께 도서관에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느냐 물었다. “요즘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에어컨 쐬러 많이들 오세요.”

추석 연휴 동안 칼 세이건의 <지구의 속삭임>을 읽었다. 1977년 무인 우주 탐사선 두 대가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우주를 향해 떠났다. 보이저 1호는 목성, 토성과 그 위성을, 2호는 1호의 목적지에 더해 천왕성과 해왕성, 그리고 그 위성들을 관측하기 위해 떠났다.여기에는 지름 30cm에 금박을 씌운 LP 레코드인 골든 레코드가 바늘, 카트리지와 함께 실렸는데, 여기에 지구를 대표한다고 결정된(고작 6주만에 제작되었지만) 음악 27, 55개 언어로 된 인사말과 지구, 인류 문명을 찍은 사진 118장이 담겼다. 이 책은 1978년에 출간되었다.

1978년에 만든 책이 한국에서는 2016년에 출간되었고 그 책에 실린 골든 레코드의 실물은, 정확히는 보이저 1호는 지금도 우주를 여행하며 지구에서 멀어지는 중이다. Where is voyager까지 구글에 입력하니 Where is voyager 1 right now라는 자동완성 문장이 나왔다. 클릭했고, NASA의 관련 페이지로 들어갔고,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지금도 얼마나 더 매순간 멀어지고 있는지 나온다. <지구의 속삭임>에 따르면 골든 레코드는 외계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지구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100년 뒤, 200년 뒤, 1000년 뒤, 580만년 뒤에 누군가가, LP를 어떻게든 작동시킬 수 있게 된다면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자이르 피그미 소녀들의 성년식 노래, 베토벤 현악사중주 13B플랫 장조 혹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중 신성한 춤을 듣게 되리라.

아니면 깨물어먹거나 똥칠을 하거나 깔고 앉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쩐지 그것은, 조금 슬픈 기분이 들어버린다.

추석 연휴가 있는 주의 소설리스트는 조 R. 랜스데일의 <밑바닥>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2000년 에드거 상 최고소설상을 받은 이 소설은 13살 소년이 연쇄살인 사건을 추척하며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성장소설이자 미스터리소설이다. 백인 소년이 훼손된 흑인 여자의 시체를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1933년 대공황 직전의 텍사스가 무대다.

사쿠라기 시노는 나오키상 수상작인 <호텔 로열>에 이어 또한번 소설리스트의 주목을 받았다. 장편소설인 <유리 갈대>는 불륜, 가출, 유괴, 살인을 비롯한 사건 혹은 사연을 만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무대 역시 호텔 로열’. 책 타이틀은 호텔 로열 사장의 세 번째 부인인 세쓰코가 지은 단가에서 나왔다.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지금 내가 읽고 쓰는 것을 우주에 있는 누군가, 혹은 미래의 누군가는 아니어도, 지금 이 시대의 다른 많은 이들이 함께 읽어주기를 바라는 날들이다.

만월의 밝음이 모두와 함께 했기를.

[소설리스트 | 이다혜]

week 37. 우리에게는 인간 전체와 함께 조금 위로 올라갈 권리가 있다

지금까지 가본 곳 중에서 살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면? 가끔씩 그런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생각해보지만, 마음에 들 만큼 좋았던 곳에서는 여행자로 머물고 싶지 굳이 살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좋은 것도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 처음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마니까. 그럼에도 굳이 한 군데를 고르라면, 국립도서관 바로 옆 동네였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국립도서관을 찾아갔을 때였다. 3호선 고속터미널 역에서 내려 한참 걸었다. 여름이었고, 정문까지 걸어가니 땀이 났다. 도서관 건물은 거기서도 조금 더 걸어가야만 했다. 도서관까지 가는 데도 이미 지쳐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도서관으로 들어가면, 서늘했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 나 역시 몸과 마음이 서늘해지면, 비로소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는 셈이었다.

거기 열람실에 앉아 있으면 서울이 아주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 특유의 한갓진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되돌아가려면 다시 꽤 먼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번잡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오직 책만 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나 좋아 나중에 나이가 든 뒤 거기서 하루하루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여름 볕에 내놓은 생선처럼, 세상은 금방 변한다. 도서관에 가서 어떤 책을 찾기 위해서 하루를 비워두는 일이 점차 없어진다. 정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디지털도서관이라는 게 들어선다. 도서관의 대출시스템은 뭔가 효율적으로 바뀌었는데 찾아갈 때마다 나는 그 절차를 잊어버려 입장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도서관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마트폰이다. 그들은 스마트폰으로 중요한 부분의 사진을 찍거나 메모를 하거나 어떤 변환 절차 없이 기사를 검색하거나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 거기 앉아 있어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한갓진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국립도서관의 장소성은 조금씩 사라진다. 그 공간의 특성이 사라지니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진다.

건축에서 말하는 장소란 물리적 환경에 인간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경험이 결합되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을 뜻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와 어떤 곳이 좋았다고 말할 때는 그곳의 물리적 환경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거기서만 가능한 경험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의 국립도서관이 서울의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면, 당연히 옛 추억은 모두 지금의 자리에 남고 새로운 곳에서는 전혀 다른 장소성이 생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래 유지되던 경험의 형태가 바뀔 때도 장소성은 달라진다.

최근에 대형서점에 갈 때마다 흥미로운 변화를 접한다. 내가 가는 곳에는 서가 아래에 독서실처럼 길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고 잠시 앉는 곳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앉아서 책을 읽으라고 만든 공간처럼 느껴진다. 공간이 그렇게 기획되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자리를 맡아놓게 된다. 빈 의자에 가방을 올려놓기도 하고 옷을 걸쳐놓기도 한다. 그런데 그 광경이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그때마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 예민하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게 아니었다. 그 풍경은 서점에 대한 나의 장소성을 훼손하고 있었다.

요즘 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TV에 영화에, 스마트폰은 또 어떻고. 그렇게 해서라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늘어난다면 어떻게 된다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독서 경험 역시 부와 같은 것일까?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면 좋은 것처럼, 어떻게 해서라도 책을 읽히게 하면 좋은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 서점의 변화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서점에 대한 나의 장소성을 훼손하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이번 주에는 신간이 많았다. 덕분에 주목받은 신간들 역시 많았다. 그중에서도 15년 넘게 ‘망명가’이자 ‘난민’으로 살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베시 헤드의 <비구름이 모일 때>가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지리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멀리 있는 남아프리카의 이야기이지만,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들으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세계는 정치가들의 세계와 반대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들에게 지시한다. 내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계획을 세운다. 나는 별들에 이르는 계단을 만들고 있다. 나한테는 인간 전체를 데리고 저 위에 갈 권리가 있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페미니즘 SF선집이라는 기획 의도가 눈에 띄는 <혁명하는 여자들> 역시 눈에 띄는 신간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선집이라 196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SF와 페미니즘 사이의 연관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모아 수록했다. 책 소개는 두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다. 하나는 SF를 온전히 남성의 장르로 규정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약자로서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여성들의 상상과 고민은 쉽게 SF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밖에도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가인 에바 킬피의 <타마라>와 나보코프의 작품 중 가장 오랜 집필시간이 소요됐다는 <재능>이 주목을 받았다. <재능>은 다양한 소설 구성 기법들, 기만과 속임수로 점철된 소설 구성 원칙, 심지어 한 문장 안에서 일어나는 시제와 시점의 예기치 않은 변화 등을 보여준다고 하니 나보코프의 솜씨가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셈이다.

[소설리스트 | 김연수]

이토록 고통스러운 인생이라면

리틀 라이프 1 , 2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시공사 펴냄

삶은 축복일까, 형벌일까. <리틀 라이프>를 읽으며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 어떤 이에게도 삶이란 축복과 형벌 사이의 어딘가 쯤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인물에게 만은 예외다. 주드에게 삶은 형벌이었다.

<리틀 라이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 몇가지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 해야겠다. “2015년 전미도서상과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모두 오른 아시아계 미국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리틀 라이프>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이라면 책을 읽어나갈수록 빤한 기대들이 차근차근 배반당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역자가 이 책을 소개하는 문구다. 조금 더 인용해보겠다. “소설은 초반에는 <섹스앤더시티>의 (정치적으로 공정한) 남성버전, 맨해튼을 배경으로 하는 현대적 성장소설 같은 예상을 하게 하지만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며 마지막까지 독자들에게 거듭 충격을 안겨준다.”

섹스앤더시티라니. 왜 아니겠는가. 하버드대 신입생 시절, 기숙사에서 만난 네 친구들의 면면을 묘사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건축가 맬컴, 화가 제이비, 막 배우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아름다운 외모의 윌럼, 그리고 연방지검 검사 주드. 곧 무너질 것 같은 더럽고 작은 방을 나눠쓰면서 이들은 20대 초반 야심만만한 뉴요커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누구나 이 시기에 그러하듯 야망과 불안을 공유하며, 가난하지만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에 매달리면서.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자신의 재능은 뉴욕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한지 이들은 번민하고 회의한다. 성공을 위해 친구가 혐오하는 모습을 그림에 담아 내기도 하며, 약에 취하기도 하고, 혼란스런 성정체성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이곳은 뉴욕이다. 전세계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곳. 그럼에도 영민하고, 아름다운 네 사람은 힘겹게 자신이 선택한 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막바지에 이르러 이들은 모두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주드는 뉴욕에서 가장 성공한 변호사, 제이비는 대규모 회고전을 하는 작가가 되고, 맬컴은 전세계 곳곳에 자신의 랜드마크를 올리며, 윌럼은 심지어 할리우드의 슈퍼 스타가 된다.) 그들이 나누는 예술과 사랑과 우정에 관한 대화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놀랄만큼 지적이고 매혹적이다.

그리고 주드의 이야기. 고아였고, 평생 외롭고 불안에 떨며 살아왔지만 대학을 통해 자신에게 애정을 듬뿍 쏟는 세 친구를 만난 남자. 법률가로서는 경쟁상대가 없을만큼 탁월하며 로스쿨 시절 은사인 헤럴드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입양될만큼 모두의 사랑을 받는 남자. 야나기하라는 그의 불안한 표정뒤의 과거를 들춰낸다.

영원히 소년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큰 키, 대학원에서 전공한 수학을 비롯해 모든 방면에서 탁월한 학업, 성악가의 길을 택했어도 될법한 노래실력, 어린시절부터 살아남기위해 배운 요리의 재능. 흠모할만한 모든 걸 가진 이 남자는 옷을 한꺼풀만 벗기면 상처투성이다. 지워지지 않은 흉터가 남은 손등, 거듭된 매질과 학대로 험한 산맥만큼 뒤틀린 등, 불구처럼 구부러진 척추, (교통사고 이후)절뚝거리는 다리와 이따금 말을 듣지 않아 휠체어를 타게 만드는 하반신, 제어할 수 없는 발작.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지독하게 학대 받았던) 과거는 성공을 하면 할 수록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옭아매고, 자신을 학대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들의 협박과 애원조차 소용없다. 그는 불안한 상태가 되면, 손목을 면도날로 긋는 자해를 해야만 하고, 스스로에게 고통을 선사해야했다. 마흔이 되기까지의 단 한번의 연애조차 그는 가학적인 상대방에게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는 악몽처럼 끝나버린다.

“자신에게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케일럽에게 맞았을 때 그는 뭔가 필연적인 느낌,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내내 자신의 오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걸 자기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일종의 벌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기-마침내-그게 온 것이다. ‘이게 네가 받을 대가야.’” (1권, 477쪽)

그야말로 보잘것 없는 삶(little life). 약간의 활기(a little life)와 기쁨조차 주어지지 않는 절망뿐인 삶. 주드는 고통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상수’라고 여기게 된다. x=x. <리틀 라이프>는 끝까지 일관되게 이 등식의 공리를 증명하는 소설이다. 그는 생각한다. 운명은 변하지 않아. 내 삶은 구원받을 수 없어. 제 아무리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게이 남성들의 청춘-연애소설인가 착각하게 만들었던 전반부를 통과하면,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주드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서사가 이어질 뿐이다.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애정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학하는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만큼 끔찍한 유년시절의 15년이 원인. 나자마자 버려져 수도원에서 자라지만, 그의 삶에는 온통 그를 성적으로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이들 뿐이었다. 자신을 환대한 첫 인물들인 친구들조차 그는 쉽게 믿지 못한다. 마침내 긴 방황을 거쳐, 인생의 유일한 의미이자 연인으로서 윌럼을 발견하게 되지만, 행복한 시절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소중한 것들은 언젠가는 신에게 강탈당하고 만다. 그것이 주드의 인생이다.

“매번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희망했다. 매번 그럴 거라고 되뇌었다. 심지어 윌럼마저 자신을 구원해줄 수 없다는 걸, 그는 구제불능이라는 걸, 이 경험은 영원히 끔찍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슬픔을 느꼈다.” (2권, 91쪽)

인정사정 없는 이 파멸의 서사는 미국 현대 소설의 전통을 잇는 것일까. 폴 매카시와 필립 로스 같은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노작가들의 후계자가 되려는 것일까. 아니다. 한야 야나기하라는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인물을 창조하고서, 인정사정없이 짓뭉게버린다. 살아야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면. 평생을 질문해온 그에게 결국 구원은 없었다. 그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준 건, 불편한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는 독자들의 몫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이렇게 몰입하게 하고, 그로인해 고통스럽게 만드는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극장에 갇혀 끔찍한 영화를 본 뒤 뛰쳐나오는 것과도, 불편한 미술 작품을 보는 것과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운동의 가학적인 쾌감과도 달랐다. 1046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는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질문을 던지며, 끝까지 몰아붙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통과 눈물의 이야기가 주는 위로를 경험해보라고,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week 36. 각자의 독립성이 유지되길

최근 받은 문자 메시지 중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반디앤루니스 종로타워점의 폐점 안내 문자였다. 2005년 오픈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데. 종각역 지하 일층에서 한 층 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뜻은 알 수 없었던 영어로 된 서점 이름이 반짝거렸다. 당시 여타 대형서점처럼 규격화된 곳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동선이 유연했다고 기억한다. 책을 고르거나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넓은 편이었고, 서점의 만듦새 자체가 세련된 곳이었다고도. 대학 시절 열심히 드나들었던 공간이 사라진다니,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2002년 폐점한 종로서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대형서점의 시조새라 할 수 있는 종로서적은, 동네책방 수준에만 머물렀던 서점들이 대형화, 기업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 출판, 서점 문화의 변천사를 스스로 만들어낸 뒤 문을 닫았다.

출판계의 불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동네 책방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도 어느덧 오랜 일. 서울을 비롯해 지방의 대형서점들이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온다. 와중에 대형서점이 자리할 만한 시내 중심가나 대로변이 아닌, 추억의 동네 책방처럼 학교 앞이나 주거지도 아닌, 그런 곳들로부터 벗어난 나름의장소에 작은 규모의 서점들이 빠르게 생겨나고 있다.(이런 서점을 요즘은 독립서점이라 부르며 구분하는 경향도 생겼다.) 이와 관련해 작년 이맘때 금요일의 리스트에서 한 차례 언급하기도 했다. 일 년 새 독립서점의 개수는 더 많아졌고, 콘셉트도 다양해졌다. 최근에 생긴 최인아책방의 경우 장서가 5000여 권이나 돼 여타 독립서점과는 차이가 있지만, 베스트셀러도 신간 도서도 없고, 장서의 1/3을 서점 대표와 지인들의 추천 도서로 꾸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이 활발히 유통되는 것이야말로 서점의 제1역할이라는 기본 관념에서 벗어나, 운영자들의 취향과 가치관을 담았다는 것이 독립서점의 가장 큰 특징이니까.

대형서점과 독립서점은 규모의 크고 작음을 넘어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을까. 대형서점은 규모를 서비스하는 곳으로 기능하리라.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떠나는 여행처럼, 낯섦과 새로움과 다양함에 한껏 노출될 수 있는. 취향이 맞는 독립서점은 몇 번 가본 여행지를 다시 찾아 좀더 깊이 그곳의 정취를 향유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동네서점에서 대형서점으로, 그리고 독립서점으로, 시대마다 책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져왔으며, 독립서점이 이제는 하나의 현상이 되어가고 있는 만큼 언젠가 독립서점들 사이에 대형서점이 들어선다 해도, 이제 더 이상 종로가 책의 메카로 통하지 않는다 해도, 안타까워하거나 걱정스럽게 여기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이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버리고 싶은 유혹도 느낀다. 복잡다단한 출판, 서점 유통의 문제들과 수익성이라는 실질적인 문제 속에서 독립서점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지속, 성장해갈지, 내년 이맘때 그 생태계는 온전하고 안정적일지 우려와 기대를 안고 지켜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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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소설리스트가 주목한 두 작품은 모두 한국 장편소설이다. 동률의 표를 얻은 두 작품은 김중혁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나는 농담이다>와 김언수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뜨거운 피>이다. 클럽에서 일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송우영과 우주 미아가 된 비행사 이일영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농담이다>는 부치지 못한 편지로 이어진다. 송우영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편지의 주인이 바로 그의 이부형제 이일영. 하지만 형 이일영은 실종되었고 송우영은 주인 없는 편지 앞에서 그저 혼란스럽다. 광활한 우주에 날리는 이일영의 고독한 메시지와, 허무주의자 코미디언 송우영의 수다스러운 스탠드업 코미디이 교차하는 가운데, 무중력 삶을 사는 현대인을 위한 중력의 매개가 될 작품일지 기대된다.

<뜨거운 피>는 부산 변두리 지역 건달들의 짠내 나는 인생 이야기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갈등과 첨예한 권력 싸움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가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던지는 그 뜨거움이 짙은 페이소스를 낳는 법, 즉흥적이고 속물적인 방식으로라도 자신이 바라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으로 슬프고 씁쓸한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

김중혁 작가는 인터뷰에서 작품의 정서가 전보다 슬퍼진 배경이 있느냐는 질문에 예전보다 (감정이) 촉촉해지고 있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전보다 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늘고 감정에 대한 얘기를 쓰고 싶단 생각이 든다모든 것이 변하듯 내 소설도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김언수 작가는 인터뷰에서 어쩌다 건달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나이 사십이 됐다. 어릴 적 부산에서 자랐다. 동네 할머니가 농약 먹고는 살아도 나이 먹고는 못 산다고 하시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자란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을 그려보려 했다. 제 소설은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번 작품은 드디어 지상에 발톱이 닿았다고 답했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따라 읽어온 팬층이 두터운 두 작가인 만큼, 이번 장편이 독자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지 기대가 크다.

셀레스트 응의 장편소설 <내가 너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 것들>도 언급된 작품이다. “리디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비수가 돼 자녀를 찌르는 과정을 리디아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미스터리를 추적해가는 추리 소설적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아마존에서 올해의 책 1로 선정됐으며, 허핑턴포스트, 북리스트,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등에서 그해 최고의 책으로 뽑힐 만큼 호평받은 데뷔작이다.

[소설리스트 | 강윤정]

week 35. 작가의 발견

금주에 출간된 소설의 목록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였다. 2015년 1월 이 작가를 알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정전의 목록에서도 볼 수 없었고, 신뢰하는 작가의 추천을 받은 이름도 아니었다. 소멸하는 한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표지가 특별하지도 않았고,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책의 제목도 상투적이었다. [금요일의 리스트]에 소개할 책을 고르는 과정에서 우연히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50년 만에 부활한 베스트셀러라는 사연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띠지에는 이언 매큐언의 찬사가 적혀있었다. 그의 추천이라면 믿고 보는 수밖에. 그렇게 이 놀라운 작가를 만났다. <스토너>를 읽는 읽는 경험은 특별했다. 책에 관한 어떤 사전지식 없이, 온전히 소설 속 인물에 빠져들었다. 자발적인 전도사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난해 가장 자신만만하게 많은 이들에게 추천한 소설이기도 했다. 새로운 작가의 발견은 그만큼 기쁜일이었다.

나는 전작주의자다. 한 작가에게 매혹되면, 그의 전작을 차례로 읽어나간다. 신작부터 거꾸로 읽어가기도 하고, 데뷔작부터 차례로 따라가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작품들의 우열을 가려보기도 한다. 좋으면 좋은 데로, 실망스러우면 실망스러운 데로, 모든 만남이 즐겁다. 작가를 좋아하게 된 그 순간 이후 모든 만남은 연애를 하는 것 만큼이나, 둘 사이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다시 만난 존 윌리엄스라는 이름은 반가웠다. 평생 4권의 소설밖에 남기지 않았고, <스토너>를 제외한 어떤 책도 찾을 수 없는 작가였기에.

존 윌리엄스가 1965년 <스토너>를 발표한지 7년뒤인 1972년에 나온 소설이 <아우구스투스>다. 21세기에 철저한 무명이던 그의 이름을 알린건 <스토너>였지만, 정작 생전의 그의 대표작은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에게 명예로운 전미도서상을 안긴 작품이었다. 존 윌리엄스는 1985년 덴버대의 문학교수직을 은퇴했고, 미완성 소설만 남긴 뒤 세상을 떠났으니 이 소설은 마지막 작품이 됐다. <스토너>, <도살자의 건널목> 등의 실패와 달리 이 소설은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스토너라는 인물의 보잘 것 없고 실패한 삶을 다룬 뒤, 로마제국의 위대한 첫 번째 황제를 다룬 소설로 성공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로마의 이야기다.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한 곳. 가치보다 특권을 존중하고 원칙이 이기심에 굴복하는 곳. 편지와 일기, 회고록 등의 형식을 통해 주변인물의 목소리가 다성화음처럼 모여 아우구스투스라는 인물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마지막에야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역사 속 영웅이 얼마나 평범한 인간이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분투했는지 묘사한다. 작가에게 있어 보잘 것 없는 스토너와 로마의 영웅은 본질적으로 다를게 없는 인간이었다. 카이사르마저도 이렇게 외친다. “세상을 정복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구나.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여주면 마치 질병이라도 만난 듯 달아나버린다. 믿을 만한 자들을 외면하고 언제든 배신할 인간들을 사랑하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채 이렇게 국가를 이끌고 있구나.”

서문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작가의 일러두기가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에 진실이 있다면, 역사보다는 픽션의 진실이다. 독자들이 그 의도, 즉 상상력의 결과로 받아들인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픽션의 진실을 말하는 작가에게서 자신의 소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비록 수십 년에 걸쳐 세 권의 소설만을 발표했지만, 다시 한 번 실패할지도 모르는 독자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그는 자신의 소설이 언젠가는 발견되길 염원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금주에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소설이었다. 이어서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선택받았다. 결혼한 한 커플의 삶을 통해 일상의 범주에 들어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던 연인도 어느 순간 낭만적인 사랑의 주술에서 풀려나게 마련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사랑의 속성이 어떻게 지속가능할 것인지 현실적인 논의를 펼친다고 한다.

[소설리스트 | 김슬기]

week 34. 듣고 읽으며 견디는 여름

노래에 관한 짧은 글을 번역하고 있다. 노래를 들으며 하고 있다. ‘노동요’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아티스트 다프트펑크의 음악. 매번 <Random Access Memory>나 <Human After All>에 있는 노래들만 듣다가, 다른 앨범들도 찾아 들어보기로 하고 발견한 앨범은 영화 <Tron>의 사운드트랙이다. 무더위와, 출국 전날 촬영을 못하겠다고 통보해온 해외의 촬영지 때문에 넋을 놓고 지냈던 일주일 동안 그 앨범만 듣고 있다.

번역 중인 존 버거의 <Some Notes on Songs>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노래를 듣는 것은 그 안에 담기기 위해서다.’

‘그 안에 담기다’로 번역한 단어는 ‘enclosed’다. ‘감싸다’로 자주 번역되는 ‘enclose’는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둘러싸는 것을 뜻하고, 그때 감싸는 무언가는 그것이 감싸는 대상과 그 대상을 둘러싼 것들 사이의 막으로 작용한다. 감싸는 무언가는 담이나 방(의 벽)처럼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둠이나 슬픔처럼 추상적인 것일 수도 있다. 존 버거는 노래가 노래를 듣는 이를 감싸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우리를 감싼 노래의 막이 잠시, 그 노래를 듣는 동안 우리를 외부로부터 지켜준다. 노래를 듣는 이는 그 시간만큼은 노래에 ‘담긴’ 채 안전하다. 어떤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바깥세상을 잠시 잊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무더위나 외국에 있는 유적지 관리담당자의 사정 같은 것들… 무더위가 지나가고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 담당자의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일 때, 다치지 않고 그 기다림의 시기를 지나는 것도 능력이다. 상황만큼이나 그 상황에 맞서는 우리의 컨디션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외부의 상황이 당분간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때를 대비해 나의 상태를 만들어놓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걸 ‘준비’라고 한다. 노래가 도움이 된다. 노래 한 곡을 듣는 만큼의 시간, 그 시간만큼의 황홀함을 무시하지 말기를… 한 곡을 듣고 돌아와도 여전히 암울하다면, 같은 곡을 한 번 더 듣자.

그 사이 무더운 여름은 지나갈 테니까. 무더위가 지나갈 거라는 사실만큼 분명한 건 없으니까. 그리고, 아직 내가 듣지 못한 좋은 노래와 읽지 못한 좋은 소설은 계속 나타날 테니까. 그것도 무더위가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말만큼 확실하니까.

이번 주 소설리스트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작품은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이다. 제목이 이 지경인데도 이렇듯 지지를 받은 것을 보면 소설가의 저주 따위는 조금도 무서워할 것이 못 된다는 뜻일까? 아무튼 작품은 뉴욕을 배경으로 아르헨티가 출신의 망명자와 그를 돌보는 미국인 요양사 사이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물리적으로 먼 나라의 이야기는 종종 그 거리만으로 매력적이다. ‘대화체’로만 되어 있다는 형식상의 신선함이 그러한 매력에 더해져서, 많은 기대를 낳았다.
두 번째로 많이 선택받은 작품은 일본의 신인작가 이마무라 나쓰코의 <여기는 아미코>다. 소녀 아미코의 시선에 비친 오해와 어긋남, 그로 인한 상처들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고 한다. 데뷔작으로 다자이 오사무 상과 미시마 유키오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는 화려한 수상 실적도 작품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작품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다. ‘화산 자락에서’ 라는 일본어 원제는 지나치게 중립적이었을까, 한국어 제목은 뭔가 더 애틋하다. 신인 건축가가 존경하는 노건축가와 함께 지냈던 일 년 여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건축과 삶에 대해 고찰하는 작품으로,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이다.

[소설리스트 l 김현우]

week.33 문학 이전의 언어

“다시 만나면 적어도 30년은 행복할 거야.
돌아가면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게.

담배 십만 개비도 사 주고 싶고, 예쁜 드레스 여러 벌과 자동차도,
늘 꿈꾸던 화산암으로 지은 집과 작은 꽃다발도 주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좋은 포도주 한 잔 하며 날 생각해줘.

여기는 일이 산더미야. 일꾼은 100명이 넘어.
이틀 전 내 생일날 당신 생각을 오래 했어.

내 편지는 잘 도착했어?
당신은 여전히 소식이 없네. 언젠간 오겠지.
매일 매순간 당신과 나만을 위한 아름다운 말을 외워.
우아한 비단 잠옷처럼 우리에게 꼭 어울리는 말을.

한 달에 편지 한 통 밖에 못 보내.
당신은 여전히 소식이 없네.

벽을 쌓다 보면 무서워져.
내겐 시멘트와 곡괭이 당신에겐 침묵. 날 삼켜버릴 듯한 웅덩이.
이 끔찍한 공포를 견디기가 힘들어.
당신 머리칼은 마른 풀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당신을 잊어버릴 것 같기도 해.”

– 페드로 코스타, 영화 <행진하는 청춘> 중
남자의 이름은 벤투라. 그는 흑인이었고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아내와 집을 잃은 뒤, 여러 집을 옮겨 다니며 만난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계속 알 수 없는 편지글을 중얼거렸다. 그가 (문자를) 읽을 수 없다는 걸,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종이가 없었고, 외우고 또 외워서 얻게 된 이 말들 만이, 화면 밖을 떠도는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영화는 지루할 만큼 길었고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꼭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극장 밖을 나온 뒤에도 그 느낌은 계속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인 카네이션 혁명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다. 그것은 리스본의 봄이라고도 불렸다. 혹은 1974년 4월 25일 혁명. 포르투갈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40년 넘게 이어진 독재정권의 식민지 전쟁에 반발해 발생한 무혈 쿠데타라고 되어 있었다. 당시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들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하여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다른 일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독립을 허용하면서, 당시 포르투갈에 체류하고 있던 5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부로부터의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숨쉬고 걸어다니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벤투라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그를 떠나갔고, 친한 친구도 죽었다. 그가 읊었던 아름다운 연애 편지는 친구를 위해 대신 쓴 편지였다. 청한 사람도, 쓰는 사람도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기에 오직 소리로만 가능한 편지. 분명 거기 있지만, 사라진다 해도 누구도 알지 못할 편지.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의 삶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존재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자리에도 소리는 남는다. 생각, 정신, 마음, 권력에 의해 결코 탈취될 수 없는 혼 같은 것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날 나는 ‘문학 이전의 언어’를 본 것 같았다.

현대 소설의 탄생이 내셔널리즘, 국민 국가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오카 마리). 유럽에서의 소설은 신의 시선에서 보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지배적 열망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슬람을 비롯한 어떤 문명에서는 본질적으로 현대 소설이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천일야화>의 나라에서 문학은 구전이며, 이야기하는 행위로서 존재하는 종결 없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현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내가 한 언어를 읽고 쓸 줄 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현대 소설의 기원과 정체성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셈이다. 그 틀에 담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 못한다. 나는 한동안 어디에도 담길 수 없는 목소리를 생각해보았다.

*

이번 주에는 지난 주와 달리, 비교적 적은 수의 소설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소설리스트가 가장 주목한 책은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이다. (이 책은 이미 출간된 바 있지만, 이번에 다시 간행되었다.) 지구 종말과 인류 종말이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미국에서는 1976년에 나왔다. 그러나 무려 40년이 지난 현재에 다시 두고 읽어볼 만한 시사점을 지닌 듯하다. “세상은 지옥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인류를 지켜주던 둥지는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다. (…) 새로운 질병이 세상을 뒤덮고 있으며, 전 인구로 퍼져나가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러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더러운 물을 대신할 것도 없다”는 줄거리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다음으로 주목한 책은 국내에 많은 작품이 소개된 요 네스뵈의 <바퀴벌레>이다. 작가 본인이 ‘나를 작가로 만든 소설’로 명명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오슬로로 돌아온 형사 해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실의 무게에 짓눌린 해리는 어느 날, 경찰에 다시 호출되어 태국으로 파견되고 ‘바퀴벌레’ 같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외로, 최수철의 <포로들의 춤>이 선택을 받았다. 최수철의 여섯번째 소설집으로, 한국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위스의 사진작가 베르너 비숍이 남긴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이 연작 소설들은, 50년대의 포로수용소 광장에서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시청 앞 광장까지 길고 먼 시간을 거슬러 한국의 역사에 관해 말한다. ‘사진에 봉인된 과거의 역사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현재의 역사로 이어질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역사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가.’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소설리스트 | 준]